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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전쟁

    1337년은 백년전쟁이 “발발한 해”로, 이후 1453년까지 이어지는 장기 전쟁의 서막에 해당합니다.wikipedia+1

    1337년, 무엇이 ‘전쟁 시작’이었나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 발루아 왕가가 프랑스 왕위 계승과 프랑스 내 영토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장기 분쟁입니다. 통상적으로 1337년을 개전 연도로 잡는 이유는 이 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내 봉토, 특히 아키텐(가스코뉴) 공작령을 몰수한다고 공식 선언하고, 군사 동원을 위한 신민소집령을 내리면서 양국이 사실상 전면전을 향해 돌입했기 때문입니다.namu+3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외손으로서, 샤를 4세 사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프랑스 왕실은 살리카법을 근거로 이를 거부하며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기에 플랑드르·가스코뉴 등 프랑스 영토 내 잉글랜드 봉토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왕위 문제와 영토 문제라는 두 축이 1330년대 후반에 폭발한 것입니다.hcsg.tistory+1

    1337년의 구체적 전개

    1337년 2월경 필리프 6세는 저지대 공국들과 프랑스 사이 전략 거점인 캉브레를 매입하는 등 대륙에서 세력 확장을 본격화하였고, 이는 잉글랜드와 독일군주들 사이 불안을 키웠습니다. 이어 4월 30일 프랑스 왕국에서 신민소집령(arrière-ban)이 선포되고, 파리의 대심의회가 에드워드 3세를 반역죄로 규정하며 그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양측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됩니다.namu+2

    이에 대응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북부의 저지대 군주들과 동맹을 맺고, 독일 황제 루트비히 4세와도 이해를 맞추며 대륙에서 프랑스를 견제하는 전략으로 선회합니다. 잉글랜드 내부적으로는 프랑스 침공 위험 때문에 국왕의 장거리 원정에 대한 의회 반대도 있었으나, 결국 동맹을 등에 업고 북프랑스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전쟁 준비가 진행되면서 1337년부터 가스코뉴 방면을 포함한 실질적 군사 충돌이 시작됩니다.namu+1

    1337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

    백년전쟁의 전체 기간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총 116년에 이르며, 학계에서는 1337년부터 1360년까지를 흔히 제1기(‘에드워드 전쟁’)로 구분합니다. 이 시기에는 크레시 전투(1346)·푸아티에 전투(1356) 등 잉글랜드 장궁병이 활약한 전투들이 이어지는데, 그 전 단계의 정치·외교적 분기점이 바로 1337년의 봉토 몰수 선언과 상호 선전 포고라는 점에서 이 연도가 상징적 출발점이 된 셈입니다.wikipedia+3

    따라서 “1337년 백년전쟁”을 요약하면,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아키텐 영지 몰수 선언과 군사 동원이 촉발점이 되었고, 이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와 영토 권리를 내세워 맞서면서, 100년이 훌쩍 넘는 대륙 규모의 장기 전쟁이 공식적으로 막을 올린 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frolicbend.tistory+3

  • 1453년

    계유정난

    •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 동로마 제국 멸망
    • 10월 19일 백년전쟁 종결
  • 계유정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권을 사실상 탈취하기 위해 김종서·황보인 등 핵심 대신 세력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적 정변입니다.contents.history+1

    언제, 누가, 무엇을 했나

    계유정난은 계유년인 1453년 단종 재위 1년에 일어났고, 주도 세력은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그를 중심으로 한 종친·무장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단종은 13세 전후의 어린 왕으로, 수렴청정을 맡을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부재해 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이 구조가 굳어지기 전에 정변을 일으켜 단종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병권과 정권을 동시에 틀어쥐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namu+3

    배경: 어린 군주와 권력 공백

    비극의 1차적 배경으로는 문종의 요절과 그에 따른 미성년 군주의 즉위가 지목됩니다. 문종은 자신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펴기도 전에 30대 말에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단종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원로 대신들과 종친, 후궁 세력 등이 얽힌 권력 분점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수렴청정을 담당할 대비가 없는 상태에서 내명부와 종친 세력이 균형 없이 팽창했고, 이 틈에서 수양대군이 왕자·후궁·종친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키워 정변의 토대를 다졌다는 해석이 나옵니다.namu+3

    전개: 김종서 습격과 권력 장악

    수양대군은 중국 사행에서 돌아온 뒤 측근들을 규합해 거사를 준비했고, 정변의 첫 단계로 단종을 보필하는 구심점이자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의 집을 야간 기습해 살해했습니다. 이어 황보인 등 단종 보좌 세력을 “역모” 혐의로 몰아 일거에 제거하고, 병권을 장악한 뒤 자신과 정변에 가담한 40여 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해 새로운 권력 질서를 구축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 전체를 통칭해 계유정난이라 부르기도 하며, 정치·군사적 쿠데타의 성격이 매우 강한 사건으로 이해됩니다.encykorea.aks+4

    결과: 단종 폐위와 세조의 집권

    계유정난 이후 단종을 떠받치던 정치 기반은 사실상 붕괴했고, 수양대군은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2년 뒤 단종의 ‘선위’를 받아 세조로 즉위했습니다. 이에 반발해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복위 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지만 오히려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져 조선 전기 정치사에서 피비린내 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세조는 정통성 논란을 의식해 세종·문종 시기의 제도 개혁 흐름을 계승한다고 강조하고, 관제 정비 등으로 강한 왕권을 구축했으나, 무력 쿠데타로 열린 왕위 계승의 선례는 이후 공신 남발과 왕위 정통성 불안을 고착시키는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겼다는 평가가 많습니다.contents.history+3[youtube]​

    역사적 평가와 해석

    계유정난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학계와 대중 담론 모두에서 비판적 평가가 우세하며, 수양대군의 권력욕과 왕위 찬탈 의지가 핵심 동인으로 지목됩니다. 문종의 조기 사망, 대비의 부재, 대신·외척 세력의 팽창 등 구조적 요인은 정변의 ‘배경’일 뿐, 단종의 정통성과 당시의 행적을 고려하면 정난 자체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고려 말 권문세족 특권을 제한하려던 제도 개혁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공신 체제 강화와 왕권·공신 간 상호 의존 구조를 심화시켜 이후 조선 정치문화에 장기적인 균열을 남긴 사건으로도 분석됩니다.[youtube]​namu+3

  • 1466년

    토른 제2조약으로 동서 프로이센 분할

    세조12년 직전법 시행

  • 프로이센 역사

    프로이센은 발트해 남동 해안의 작은 지역에서 출발해, 18~19세기에 독일 통일을 이끈 군사·관료 국가로 성장했다.wikipedia+1

    기원: 발트족과 튜튼 기사단

    고대의 ‘프로이센’은 독일인이 아니라 발트계 프루스(Pruss)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오늘날 폴란드 북부·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일대에 해당한다. 13세기 폴란드 마조비아 공 콘라트가 이 이교도 지역의 기독교화를 명분으로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을 불러들이면서 군사 정복이 시작되었고, 기사단국이 수립되며 토착 프로이센인은 거의 전멸하거나 동화됐다.wikipedia+1

    이 튜튼 기사단국은 발트해 연안의 상업·농업 지배체제를 구축했지만, 15세기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1466년 토른 제2조약으로 동·서 프로이센으로 분할되었다. 서프로이센은 폴란드 왕의 자치령이 되었고, 기사단이 직접 지배하는 동프로이센은 폴란드의 봉신 영지가 되었다.naver+1

    종교개혁과 프로이센 공국

    종교개혁 시기,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는 루터파로 개종하고 1525년 기사단국을 세속화해 ‘프로이센 공국’을 세웠다. 그는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 남는 조건으로 세속 공작위를 인정받았고, 이로써 프로이센은 최초의 루터파 영주국이자 프로테스탄트 영지로 자리잡았다.[wikis.krsocsci]​

    알브레히트의 가문이 단절되자,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호엔촐레른가가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형성되었다. 이때까지 프로이센 공국은 여전히 명목상 폴란드 왕의 봉건적 종주권 아래 있었다.wikipedia+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부상

    17세기 중엽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대선제후’)은 전쟁과 외교를 통해 프로이센 공국의 대외 독립을 확보하고, 강력한 상비군과 관료제를 구축해 군사·재정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 1657년 웰라우 조약 등으로 폴란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면서 프로이센 공작은 완전한 주권 군주가 되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실질적인 중견강으로 부상했다.wikis.krsocsci+1

    이 시기 구츠헤르샤프트(대토지 지주제)와 농노제 기반의 농업 구조 위에 귀족(융커) 지배와 군사국가가 결합하는 특유의 프로이센 사회 구조가 성립했다.[ko.wikipedia]​

    1701년 프로이센 왕국 성립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로 대관하며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영토 밖(동프로이센)에 한정된 왕호였지만, 곧 브란덴부르크까지 포함하는 실질적 왕국으로 이해되었다.wikipedia+1

    프리드리히 1세는 루이 14세를 모방한 ‘화려한 궁정’을 추구하며 베를린에 예술·과학 아카데미, 대학을 세워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으나, 과도한 사치로 재정 압박을 심화시켰다.[wikis.krsocsci]​

    군국주의 국가로의 변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재위 1713–1740)는 ‘군인왕’으로 불리며 정반대 노선을 택했다. 그는 궁정 사치를 철저히 줄이고, 관료제 정비와 징병제 강화로 병력을 유럽 상위 규모로 끌어올려, 인구와 경제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한 상비군을 유지했다.[wikis.krsocsci]​

    이 과정에서 귀족(융커)는 장교단을 독점하고, 농민은 군역과 농노제에 묶이는 구조가 강화되어, 고도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한 국가가 만들어졌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가진 국가’라기보다 ‘국가를 가진 군대’라는 말이 상징하듯, 군사력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wikipedia+1

    프리드리히 2세와 대국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재위 1740–1786)는 계몽군주를 자처하면서도 공격적 외교·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을 유럽 열강 반열에 올렸다. 즉위 직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에 뛰어들어 슐레지엔을 획득함으로써,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고 영토·인구·산업 기반을 크게 확장했다.naver+1

    그는 또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해 서프로이센을 합병, 동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 본토를 육로로 연결하는 ‘영토 연속성’의 숙원을 달성했다. 내부적으로는 법전 편찬, 행정 개혁, 종교 관용, 농업·경제 정책을 통해 계몽주의적 통치를 시도했고, 볼테르 등과 교류하며 자신을 ‘국가의 제1공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namu+2

    나폴레옹의 충격과 개혁

    그러나 후계자 시대에 군사·행정 시스템은 정체되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패배 후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의 절반과 영향력을 상실하는 중대 위기를 맞는다. 프로이센은 사실상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하며 대륙봉쇄령과 주둔군 부담을 겪었다.naver+1

    이 패배는 샤른호르스트·클라우제비츠·슈타인·하르덴베르크 등의 군사·사회 개혁을 촉발했다. 농노제 부분 폐지, 지방자치 도입, 군제·교육 개혁을 통해 ‘국민의 군대’와 근대적 행정국가로 재편되었고, 이는 이후 독일 민족주의와 통일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wikis.krsocsci]​

    빈 체제 속의 보수 강국

    1813–1815년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핵심 역할을 수행했고, 워털루 전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다시 강대국 지위를 회복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라인강 유역(베스트팔렌 등)을 얻고 인구 1,000만 규모의 중부·동부 독일 대국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연방의 양대 맹주가 되었다.[wikis.krsocsci]​

    그러나 내적으로는 러시아·오스트리아와 함께 신성동맹을 맺고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며, 관료·지주 중심의 반동 체제가 지속되었다. 1848년 3월혁명으로 잠시 자유주의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혁명이 좌절되자 지주 지배와 보수질서가 재확인되었다.[wikis.krsocsci]​

    비스마르크와 철혈통일

    1862년 총리로 임명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철과 피” 발언으로 상징되는 현실주의 외교·군비 확충을 통해 의회를 무력화하고 왕권·관료제를 기반으로 통일 전략을 추진했다. 그는 1864년 덴마크 전쟁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획득하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배제하며 북독일연방(프로이센 주도)을 창설했다.namu+2

    이어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해 독일 남부국가들을 끌어들이고, 1871년 베르사유에서 독일 제국 성립과 함께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영역·인구·군사·관료제에서 압도적 비중을 가진 ‘제국의 맹주’이자 사실상의 독일 국가와 동일시되었다.wikipedia+1

    제국과 프로이센의 종말

    1871년 이후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 내 최대 구성국으로 남아, 왕이 곧 황제, 총리가 곧 제국수상의 역할을 겸하는 구조 속에서 정치·군사·관료 엘리트를 공급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시대(1888–1918) 함대 경쟁과 제국주의 정책, 주변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패전과 함께 제국과 군주제는 붕괴했다.wikipedia+1

    1918년 혁명으로 호엔촐레른 왕가는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면서 프로이센 왕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고, ‘프로이센’은 공화국 내의 하나의 주(州)로 재편되었다. 이후 나치 시대를 거쳐 1947년 연합국이 프로이센 국가의 법적 해산을 선언하면서, 프로이센은 역사적 개념으로만 남게 되었다.wikipedia+2

  •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은 10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중앙·서유럽에 존재했던 기독교 군주 연합체로, 형식상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을 자처한 다민족 제국이다.wikipedia+1

    성격과 영토

    신성 로마 제국은 오늘날 의미의 중앙집권적 국가라기보다 수백 개의 왕국, 공국, 주교령, 자유도시 등이 느슨하게 결합한 정치적 연합체였다. 제국의 중심은 독일 지역이었고, 시기에 따라 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북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동부·서부 일부 등 중부 유럽 전역을 포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이탈리아 등 주변 지역이 이탈해, 근세 이후에는 주로 독일어권 중심 체제로 수축되었다.worldhistory+3

    기원과 ‘신성·로마’라는 이름

    기원은 보통 962년 동프랑크 왕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게서 황제관을 쓰고 로마 황제 칭호를 부여받은 시점으로 본다. 이때부터 프랑크·독일 왕권이 서로마 제국의 정통한 계승자라는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 이념이 공식화되었다. ‘신성’(sacrum)이라는 수식은 1157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자신이 이끄는 제국을 교황권과 대등한 신성한 질서의 축으로 내세우기 위해 처음 국호에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16세기에 이르면 공식 국호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Sacrum Imperium Romanum Nationis Germanicae)’으로 정착했다.namu+4

    정치 구조와 황제의 권위

    신성 로마 황제는 형식상 유럽 가톨릭 세계의 최고 세속 군주이자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간주되었지만, 실제 권한은 제후들의 동의에 크게 의존했다. 황제는 세습이 아니라 선제후(선거권을 가진 몇몇 유력 제후)의 선거로 선출되었고, 대관식에서 교황의 인준을 받는 것이 이상적 절차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제국 정치의 핵심은 황제권과 제후권, 그리고 교황권 사이의 미묘한 힘의 균형이었고, 황제권이 강했던 시기(슈타우펜 왕조, 초기 합스부르크)와 극히 약화된 시기가 반복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루터파·칼뱅파 제후들이 등장하면서 황제의 가톨릭적 통합 권위가 더 약화되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각 제후국의 주권을 사실상 국제적으로 승인했다.wikipedia+2

    역사 전개와 해체

    중세 초·중기 제국은 이탈리아와 로마 교황청을 둘러싼 이탈리아 원정, 서임권 투쟁 등으로 교황권과 빈번히 충돌하면서도, 십자군과 교회 질서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15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사실상 장기 세습하면서 제국은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한때 스페인·보헤미아·헝가리 등과 결합해 유럽 최강의 왕조 블록을 형성했다. 그러나 30년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의 부상으로 제국의 실질적 통합력은 크게 약화되어, 18세기에는 이름뿐인 상징적 연합체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결정타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1806년 나폴레옹이 주도한 라인동맹 결성과 해체 압박 속에서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가 황제위를 내려놓고 제국의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약 800여 년의 역사가 끝났다.namu+4

    사후 평가와 의미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이 “신성하지도, 로마적이지도, 제국도 아니다”라고 비꼬았을 만큼, 근대인의 눈에는 비효율적이고 파편화된 체제로 보였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 제국은 중부 유럽에서 공통의 법질서와 외교적 틀을 제공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 등 여러 지역의 정치·법문화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동시에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긴장은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의 분리, 그리고 근대적 주권 개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유럽 정치사 핵심 주제 중 하나로 평가된다.atlasnews+3[youtube]​

  • 1716kst07jan26

    풍향고 3회

    콤비네이션 피자

    코카콜라 제로

    아이패드로 피아노 배우기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프라터 놀이공원

    비포 선라이즈

    대관람차

    미분과 적분

    함수

    이차 함수

    피스타치오

    오스트리아 헝가리 역사적 관계

  • 김혜영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멜로가 체질 (공동 연출)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메인 연출)

  • 오늘 밤, 이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신시아

    추영우

    원작 : 오늘 밤, 이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고등학생

    기억 상실증

    내 머릿속의 지우개

    복숭아

    좋아하는 숫자

    엠비티아이

    촬영지

    대만 영화

    일본 영화

    좋은 밤 좋은 꿈

    좋은 냄새

    다우니

    제사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는다

    깊은 감정

    버스

    선행성 기억 상실증

    기억 장애

    애플 메모

    기록

    어바웃타임

    망각

    펭귄

    바닷가

    아쿠아리움

    Y는 아쿠아리움이 싫다고 말했다.

    자카스 펭귄

    아프리카 펭귄

    모노 사노

    봄날은 간다

    과학, 사회적 합의, 검증 가능성 (07feb26bath)

    절차 기억

    여수

    아쿠아플라넷 여수

    여수장도근린공원

    카페 모카힐

    신덕해변

    인지의 영역 그리고 여집합

    서윤

    신시아

    오세이사

    이치조 미사키

    감독 김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