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권을 사실상 탈취하기 위해 김종서·황보인 등 핵심 대신 세력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적 정변입니다.contents.history+1
언제, 누가, 무엇을 했나
계유정난은 계유년인 1453년 단종 재위 1년에 일어났고, 주도 세력은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그를 중심으로 한 종친·무장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단종은 13세 전후의 어린 왕으로, 수렴청정을 맡을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부재해 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이 구조가 굳어지기 전에 정변을 일으켜 단종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병권과 정권을 동시에 틀어쥐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namu+3
배경: 어린 군주와 권력 공백
비극의 1차적 배경으로는 문종의 요절과 그에 따른 미성년 군주의 즉위가 지목됩니다. 문종은 자신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펴기도 전에 30대 말에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단종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원로 대신들과 종친, 후궁 세력 등이 얽힌 권력 분점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수렴청정을 담당할 대비가 없는 상태에서 내명부와 종친 세력이 균형 없이 팽창했고, 이 틈에서 수양대군이 왕자·후궁·종친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키워 정변의 토대를 다졌다는 해석이 나옵니다.namu+3
전개: 김종서 습격과 권력 장악
수양대군은 중국 사행에서 돌아온 뒤 측근들을 규합해 거사를 준비했고, 정변의 첫 단계로 단종을 보필하는 구심점이자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의 집을 야간 기습해 살해했습니다. 이어 황보인 등 단종 보좌 세력을 “역모” 혐의로 몰아 일거에 제거하고, 병권을 장악한 뒤 자신과 정변에 가담한 40여 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해 새로운 권력 질서를 구축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 전체를 통칭해 계유정난이라 부르기도 하며, 정치·군사적 쿠데타의 성격이 매우 강한 사건으로 이해됩니다.encykorea.aks+4
결과: 단종 폐위와 세조의 집권
계유정난 이후 단종을 떠받치던 정치 기반은 사실상 붕괴했고, 수양대군은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2년 뒤 단종의 ‘선위’를 받아 세조로 즉위했습니다. 이에 반발해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복위 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지만 오히려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져 조선 전기 정치사에서 피비린내 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세조는 정통성 논란을 의식해 세종·문종 시기의 제도 개혁 흐름을 계승한다고 강조하고, 관제 정비 등으로 강한 왕권을 구축했으나, 무력 쿠데타로 열린 왕위 계승의 선례는 이후 공신 남발과 왕위 정통성 불안을 고착시키는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겼다는 평가가 많습니다.contents.history+3[youtube]
역사적 평가와 해석
계유정난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학계와 대중 담론 모두에서 비판적 평가가 우세하며, 수양대군의 권력욕과 왕위 찬탈 의지가 핵심 동인으로 지목됩니다. 문종의 조기 사망, 대비의 부재, 대신·외척 세력의 팽창 등 구조적 요인은 정변의 ‘배경’일 뿐, 단종의 정통성과 당시의 행적을 고려하면 정난 자체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고려 말 권문세족 특권을 제한하려던 제도 개혁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공신 체제 강화와 왕권·공신 간 상호 의존 구조를 심화시켜 이후 조선 정치문화에 장기적인 균열을 남긴 사건으로도 분석됩니다.[youtube]namu+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