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은 발트해 남동 해안의 작은 지역에서 출발해, 18~19세기에 독일 통일을 이끈 군사·관료 국가로 성장했다.wikipedia+1
기원: 발트족과 튜튼 기사단
고대의 ‘프로이센’은 독일인이 아니라 발트계 프루스(Pruss)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오늘날 폴란드 북부·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일대에 해당한다. 13세기 폴란드 마조비아 공 콘라트가 이 이교도 지역의 기독교화를 명분으로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을 불러들이면서 군사 정복이 시작되었고, 기사단국이 수립되며 토착 프로이센인은 거의 전멸하거나 동화됐다.wikipedia+1
이 튜튼 기사단국은 발트해 연안의 상업·농업 지배체제를 구축했지만, 15세기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1466년 토른 제2조약으로 동·서 프로이센으로 분할되었다. 서프로이센은 폴란드 왕의 자치령이 되었고, 기사단이 직접 지배하는 동프로이센은 폴란드의 봉신 영지가 되었다.naver+1
종교개혁과 프로이센 공국
종교개혁 시기,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는 루터파로 개종하고 1525년 기사단국을 세속화해 ‘프로이센 공국’을 세웠다. 그는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 남는 조건으로 세속 공작위를 인정받았고, 이로써 프로이센은 최초의 루터파 영주국이자 프로테스탄트 영지로 자리잡았다.[wikis.krsocsci]
알브레히트의 가문이 단절되자,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호엔촐레른가가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형성되었다. 이때까지 프로이센 공국은 여전히 명목상 폴란드 왕의 봉건적 종주권 아래 있었다.wikipedia+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부상
17세기 중엽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대선제후’)은 전쟁과 외교를 통해 프로이센 공국의 대외 독립을 확보하고, 강력한 상비군과 관료제를 구축해 군사·재정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 1657년 웰라우 조약 등으로 폴란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면서 프로이센 공작은 완전한 주권 군주가 되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실질적인 중견강으로 부상했다.wikis.krsocsci+1
이 시기 구츠헤르샤프트(대토지 지주제)와 농노제 기반의 농업 구조 위에 귀족(융커) 지배와 군사국가가 결합하는 특유의 프로이센 사회 구조가 성립했다.[ko.wikipedia]
1701년 프로이센 왕국 성립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로 대관하며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영토 밖(동프로이센)에 한정된 왕호였지만, 곧 브란덴부르크까지 포함하는 실질적 왕국으로 이해되었다.wikipedia+1
프리드리히 1세는 루이 14세를 모방한 ‘화려한 궁정’을 추구하며 베를린에 예술·과학 아카데미, 대학을 세워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으나, 과도한 사치로 재정 압박을 심화시켰다.[wikis.krsocsci]
군국주의 국가로의 변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재위 1713–1740)는 ‘군인왕’으로 불리며 정반대 노선을 택했다. 그는 궁정 사치를 철저히 줄이고, 관료제 정비와 징병제 강화로 병력을 유럽 상위 규모로 끌어올려, 인구와 경제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한 상비군을 유지했다.[wikis.krsocsci]
이 과정에서 귀족(융커)는 장교단을 독점하고, 농민은 군역과 농노제에 묶이는 구조가 강화되어, 고도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한 국가가 만들어졌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가진 국가’라기보다 ‘국가를 가진 군대’라는 말이 상징하듯, 군사력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wikipedia+1
프리드리히 2세와 대국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재위 1740–1786)는 계몽군주를 자처하면서도 공격적 외교·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을 유럽 열강 반열에 올렸다. 즉위 직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에 뛰어들어 슐레지엔을 획득함으로써,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고 영토·인구·산업 기반을 크게 확장했다.naver+1
그는 또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해 서프로이센을 합병, 동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 본토를 육로로 연결하는 ‘영토 연속성’의 숙원을 달성했다. 내부적으로는 법전 편찬, 행정 개혁, 종교 관용, 농업·경제 정책을 통해 계몽주의적 통치를 시도했고, 볼테르 등과 교류하며 자신을 ‘국가의 제1공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namu+2
나폴레옹의 충격과 개혁
그러나 후계자 시대에 군사·행정 시스템은 정체되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패배 후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의 절반과 영향력을 상실하는 중대 위기를 맞는다. 프로이센은 사실상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하며 대륙봉쇄령과 주둔군 부담을 겪었다.naver+1
이 패배는 샤른호르스트·클라우제비츠·슈타인·하르덴베르크 등의 군사·사회 개혁을 촉발했다. 농노제 부분 폐지, 지방자치 도입, 군제·교육 개혁을 통해 ‘국민의 군대’와 근대적 행정국가로 재편되었고, 이는 이후 독일 민족주의와 통일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wikis.krsocsci]
빈 체제 속의 보수 강국
1813–1815년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핵심 역할을 수행했고, 워털루 전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다시 강대국 지위를 회복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라인강 유역(베스트팔렌 등)을 얻고 인구 1,000만 규모의 중부·동부 독일 대국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연방의 양대 맹주가 되었다.[wikis.krsocsci]
그러나 내적으로는 러시아·오스트리아와 함께 신성동맹을 맺고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며, 관료·지주 중심의 반동 체제가 지속되었다. 1848년 3월혁명으로 잠시 자유주의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혁명이 좌절되자 지주 지배와 보수질서가 재확인되었다.[wikis.krsocsci]
비스마르크와 철혈통일
1862년 총리로 임명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철과 피” 발언으로 상징되는 현실주의 외교·군비 확충을 통해 의회를 무력화하고 왕권·관료제를 기반으로 통일 전략을 추진했다. 그는 1864년 덴마크 전쟁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획득하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배제하며 북독일연방(프로이센 주도)을 창설했다.namu+2
이어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해 독일 남부국가들을 끌어들이고, 1871년 베르사유에서 독일 제국 성립과 함께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영역·인구·군사·관료제에서 압도적 비중을 가진 ‘제국의 맹주’이자 사실상의 독일 국가와 동일시되었다.wikipedia+1
제국과 프로이센의 종말
1871년 이후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 내 최대 구성국으로 남아, 왕이 곧 황제, 총리가 곧 제국수상의 역할을 겸하는 구조 속에서 정치·군사·관료 엘리트를 공급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시대(1888–1918) 함대 경쟁과 제국주의 정책, 주변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패전과 함께 제국과 군주제는 붕괴했다.wikipedia+1
1918년 혁명으로 호엔촐레른 왕가는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면서 프로이센 왕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고, ‘프로이센’은 공화국 내의 하나의 주(州)로 재편되었다. 이후 나치 시대를 거쳐 1947년 연합국이 프로이센 국가의 법적 해산을 선언하면서, 프로이센은 역사적 개념으로만 남게 되었다.wikipedi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