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가 알려준 지혜, 건강을 담은 도토리 한 상
경기도 양주의 한적한 산기슭,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길 끝에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식당이 있다. 간판에는 ‘도토리 한 상’이라는 이름이 소박하게 걸려 있다. 이름만 보면 그냥 도토리 음식을 파는 집 같지만, 이곳에는 남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시골 식당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한결같이 건강하고 따스한 철학이 손님을 맞는다.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구수한 육수 냄새다. 진한 멸치와 다시마, 표고버섯 향이 어우러져 입맛을 자극한다. 그 향 속에는 도토리의 순한 고소함이 섞여 있다. 그리고 주방 한쪽에서 묵을 썰고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사장님 김영권 씨의 모습이 바쁘게 움직인다. 나이 지긋한 그는 손끝으로 국수 반죽의 질감을 느끼며 “오늘 반죽은 도토리 가루 비율을 조금 더 높여봤어요. 이런 날씨엔 소화에 좋은 따뜻한 국물이 최고거든요”라며 미소 짓는다.
다람쥐에게 배운 삶의 지혜
김영권 씨가 도토리 음식에 마음을 두게 된 건 10년 전쯤이었다. 어느 날, 산책 삼아 들렀던 양주의 뒷산에서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다람쥐 한 마리를 보았다. 겨울을 앞두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토리를 입에 문 채 바위 틈에 감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작은 몸으로 겨울을 준비하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부지런하고 현명하게 사는 게 바로 자연의 지혜구나.”
그날 이후 김 씨는 도토리를 자세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토리의 영양 성분, 가공 과정, 떫은맛을 없애는 방법 등 손수 연구했다. 그는 요리나 식품 관련 전공자가 아니었지만, 배움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도토리에는 탄닌 성분이 풍부해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혈당 조절과 소화 개선에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이걸 음식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건강을 나누자’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도토리 칼국수’와 ‘도토리묵 탕수육’이다.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도토리 한 상
이 집의 대표 메뉴인 도토리 칼국수는 일반 칼국수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국수를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고 차분한 도토리 향이 퍼지며 입안을 감싼다. 면발은 쫄깃하면서도 부담이 없고, 무겁지 않게 넘어간다. 육수는 닭뼈와 멸치, 표고버섯, 다시마를 끓여낸 깊은 맛으로, 여기에 김치 한 젓가락을 올려 먹으면 완벽한 궁합이 된다. 김영권 씨는 “도토리에는 탄닌이 들어 있어서 속을 편하게 해주고, 면에 첨가하면 소화가 훨씬 잘돼요”라고 설명한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무한 리필’이다. 김 씨는 “예전에 저도 가난해서 배고플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 마음에 국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만큼은 절대 배고프게 보내지 말자고 결심했어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국수를 몇 번을 더 달라고 해도 눈치줄 사람 한 명 없다. 한 번 리필할 때마다 사장님은 ‘더 드세요, 배부르게 먹어야죠’라며 소박한 말로 정을 나눈다.
도토리묵 탕수육 또한 이 집의 자랑이다. 일반적인 돼지고기 탕수육 대신 도토리묵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튀겨내는데,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말랑하게 녹아든다. 새콤달콤한 소스가 부드러운 묵과 어우러져 의외로 풍성한 식감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묵으로 탕수육을 만든다고 하면 의아하게 여겼던 손님들도 한 입 맛본 뒤에는 꼭 포장 주문을 해간다.
헌혈증으로 나누는 온기
‘도토리 한 상’의 또 다른 특별한 전통은 헌혈증 이벤트다. 이곳에서는 헌혈증을 가져오면 도토리 칼국수 한 그릇을 무료로 제공한다. 김 씨가 이 이벤트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헌혈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진 분들에게 따뜻한 한 그릇은 제가 드릴 수 있는 작은 보답이죠.”
가게 한쪽 벽에는 지금까지 손님들이 기부한 헌혈증이 액자처럼 나란히 걸려 있다. 어떤 건 변색된 오래된 증서이고, 어떤 건 최근에 발행된 새 헌혈증이다. 한 장 한 장에는 각기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김 씨는 그 헌혈증들을 볼 때마다 ‘세상에는 아직 따뜻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가 운영하는 이 가게는 단순한 맛집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따뜻한 식탁 공동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양주의 겨울이 매섭게 차가워지는 지금도 이곳만큼은 늘 웃음과 온기가 가득하다.
한 그릇의 철학, 그리고 지역의 이야기
김 씨는 매일 아침 일찍 문을 연다. 도토리 묵을 만들려면 전날 밤부터 도토리를 담가놓고, 새벽엔 직접 손으로 가루를 푼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질감이 나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로 하면 빠르긴 하지만, 맛이 달라요. 손맛이라는 게 있거든요”라고 말한다. 손님들 중에는 일부러 서울에서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다른 칼국수집보다 담백하고 속이 편하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다.
양주는 예로부터 산과 들이 어우러진 지역으로, 도토리가 풍부하게 열리는 마을이었다. ‘도토리 한 상’은 그 지역의 자연과 전통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이어가는 산물이다. 김 씨는 “양주의 산이 준 선물로 음식을 만들고, 그걸 사람들과 나누는 게 제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요리사’가 아니라 ‘이웃의 밥상 지기’로 소개한다.
겨울을 데우는 한 그릇의 힘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찬다. 눈길을 헤치고 온 등산객, 인근 공장의 젊은 노동자, 지역 어르신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처음 마주한 이들이라도 자리 사이로 웃음과 대화가 오간다. 그 중심에 늘 김영권 씨가 있다. 그는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더 필요하신 거 있냐’며 둘러보고, 아이 손을 잡고 들어온 부모에게는 ‘아가야, 따뜻할 때 먹어야 돼’ 하며 직접 그릇을 내려놓는다.
음식은 결국 사람이다. 김영권 씨에게 도토리는 단순한 재료 그 이상이다. 다람쥐가 겨울을 준비하듯, 그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마음의 여유를 준비시켜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배부른 사람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이면 좋겠어요”라는 그의 말 속에는 20년 넘게 지켜온 신념이 응축돼 있다.
양주의 찬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도토리 한 상’의 문 앞에는 여전히 따뜻한 김이 올라온다. 허기를 달래러 온 이들은 그 한 그릇 안에서 단순한 맛을 넘어 ‘삶의 위로’를 얻는다. 다람쥐가 남긴 지혜를 사람이 이어받아, 다시 사람에게 건네주는 공간. 그렇게 작은 식당 하나가 한 지역의 마음을 데우고 있다.